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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보살들이여! - 오쇼 라즈니쉬 법구경 강의 中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마음이 주主가되어 모든일을 시키나니,

우리는 마음을 통해 세상을 만든다.

불순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리라,

수레를 끄는 황소 뒤에 바퀴가 따라오듯이.




오쇼 법구경 강의 :
진정으로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결국 명상이란 마음을 멈추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마음을 버리고 무심이라 불리는 순수한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무심의 공간 속에서 그대는 궁극적 진리인 담마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무심으로 이동하는 것은 걸음, 곧 파다(pada)이다.
이것이 담마파다(dhammapada)의 모든 비밀이다.

붓다가 '불순한 마음' 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대는 이말을 오해하기 쉽다.
그가 말하는 '불순한 마음'은 곧 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마음은 불순하기 때문이다.
오직 무심만이 순수하다.
순수란 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순은 마음을 뜻한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


마음이 주가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우리는 마음을 통해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행복이 뒤따르리라,

그림자가 물체를 떠나지 않듯이.




오쇼 법구경 강의 :
불행은 부산물이다. 지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행은 잠의 부산물이며 지복은 깨어 있음의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곧바로 지복을 추구할 수 없다.
직접 지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복은 직접 지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지복이 아니라 의식의 각성을 추구한다.
그리고 의식의 각성이 일어나면 지복은 저절로 따라온다.

떼놓을 수 없는 그림차처럼.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강탈했다."

이런 생각을 마음에 새기면 미움 속에 살게 된다.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강탈했다."

이런 생각을 버리면 사랑 속에 살게 된다.



오쇼 법구경 강의: 미움은 과거, 또는 미래와 더불어 존재한다. 반면에, 사랑은 과거와 미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움은 과거와 관련이 있다. 어제 어떤 사람이 그대를 모욕했다.
오늘도 그대는 그것을  하나의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숙취에서 덜 깬것처럼 그대는 어제의 모욕을 간직하고 있다.
또는 어떤 사람이 내일 그대를 모욕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 두려움의 그림자가 생긴다. 이제 그대는 그 모욕에 맞설 준비를 한다.

이렇게 미움은 과거와 미래에 존재한다. 현재에 미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에 미워하려고 시도해 보라. 오늘 당장 시도해 보라.
과거나 미래와 연관짓지 않고 현재의 어떤 사람을 미워하려고 해 보라.
그대는 전혀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의 본성상 그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은 현재에 가능하다. 사랑은 과거나 미래의 참고 사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이며, 사랑의 자유로움이다.
미움은 일종의 구속이다.
미움은 그대 스스로 만든 감옥이다.













이 세상에서는


미움으로 미움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물리치나니,

이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법이다.



오쇼 법구경 강의 :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Ais dhamma sanantano).
"이것이 영원한 법이다."
붓다는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한다. 영원한 법이란 무엇인가?
오로지 사랑만이 미움을 물리치며, 빛만이 어둠을 물리친다.
이것이 영원한 법이다.
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빛밖에 없는가?
그것은 어둠 자체가 부정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긍정적인 측면을 갖지 못한다. 사실, 어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있겠는가? 직접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벙법은 없다.
어둠에 대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빛을 갖고 하는 수밖에 없다. 불을 밝히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미움은 어둠이다. 미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도덕선생과 신비주의자들 사이의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도덕선생은 계속해서 허위의 법을 제시한다.
"어둠과 싸워라. 미움, 분노, 섹스와 싸워라. 이것과 싸우고 저것과 싸워라!"
결국, "부정적인 것과 맞서 싸우라." 는 것이 그들의 태도이다.
반면에 진정한 스승은 긍정적인 방법을 가르친다.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Ais dhamma sanantano....그들은 영원한 법을 가르친다.
"어둠과 싸우지 말라."
미움은 어둠이다. 섹스도 어둠이다. 질투, 탐욕, 분노도 어둠이다. 빛을 밝혀라....
어떻게? 사념을 버리고 침묵하라.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주시하라....이것이 빛을 밝히는 방법이다.






인간의 목숨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것을 알면서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감각에서 행복을 구하고


음식과 잠을 탐내면

마침내 쓰러지고 말리라.

뿌리가 약한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듯이.



오쇼 법구경 강의 : 붓다는 말한다.그의 말을 가슴에 새겨 들으라.
감각에 의존한다면 그대는 매우 깨지기 쉬운 존재가 될 것이다. 감각은 그대를 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왜냐면 감각은 지속적인 토대가 없기 때문이다. 감각은 끊임없이 변한다.
감각 안에서는 모든게 유동적이다. 어디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어디에 토대를 만들수 있겠는가?

한순간은 이 여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는 저 여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감각에 의존하여 판단한다면 끝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은 끊임없이 견해를 바꾸기 때문이다.

붓다는 말한다.
"감각에 기대지 말라. 각성(awareness) 에 의지하라."

각성은 감각 뒤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다. 보는 것은 눈이 아니다.
안과의사에게 가서 물으면 눈이 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눈은 기계장치일 뿐이다. 눈은 창문과 같다.창문은 볼 수 없다.
그대는 창문가에 서서 밖을 내다볼 수 있다.
그처럼 눈은 하나의 창문, 내다보는 구멍이다. 그렇다면, 눈뒤에 숨어있는 자는 누구인가?
듣는 것은 귀가 아니다. 귀 뒤에 숨어서 듣는 자는 누구인가? 느낌을 통해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
그런 식으로 계속 파헤쳐 보라. 그러면 어떤 토대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그대의 삶은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메말라 버릴 것이다.













의식이 깨어 있으며 강하고 겸손한 자,


자신을 잘 다스리고 법에 충실한 자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리라.

바람이 산을 무너뜨릴 수 없듯이.



오쇼 법구경 강의 : 명상은 그대를 각성시킬 것이다. 명상을 통해 그대는 강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해진다.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그대 자신을 경험한다. 그대는 몸이 아니다. 그대는 마음이 아니다.
그대는 '주시하는 순수한 의식' 이다. 이 주시하는 의식을 경험하면 엄청난 각성이 일어난다. 뱀이 또아리를 풀듯이
잠자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듯이 돌연한 각성이 밀려온다.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경험한다. 생애 최초로 진리를 느낀다.

확실히 이 경험은 그대를 강하게 한다. 그대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바람에 쉽게 부러지는 허약한 나무가 아니다.
이제 그대는 신이다! 이제 그대는 토대를 갖고 튼튼하게 부리를 내렸다. 아무리 강한 바람도 산을 뒤집을 수는 없다.
그대는 강해진다. 그러나 이 강함은 그대 안에 어떤 에고도 심어주지 않는다.그대는 겸손해진다.
왜냐하면 그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동물, 새, 나무, 바위에도 주시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만 잠자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똑같은 주시자, 똑같은 신이 들어있다.
이것은 그대를 겸손하게 만든다.
바위 앞에 서 있어도 그대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든 존재는 의식이라는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생각이 청정치 못하고,

무모한 욕심을 부리고 진실되지 못하다면,

노란색 가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본성을 잘 다스리고,

청정하고 진실된다면,

그에게 노란색 가사는 실로 잘 어울리는 것.









진실인가, 거짓인가? - 오쇼 라즈니쉬 법구경 강의 中





거짓을 진실로 받들고


진실을 거짓으로 여기면


이는 그릇된 소견이라,


그대는 가슴을 무시하고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는구나.


오쇼 법구경 강의 : 마음은 욕망이다.

그대는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부를 얻으려는 얻으려는 욕망을 계속 축적하고 있다.

그리고 내면에 고동치는 가슴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

그대는 이미 신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궁극적인 법의 일부라는 것을 잊었다.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Ais dhamma sanantano....그대는

자신이 영원한 법의 일부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대는 가슴을 통해 신과 연결된다.

그대의 가슴은 신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대의 가슴은 지금도 신으로 부터, 진리로 부터 영양분을 흡수하고 있다.


붓다는 말한다. 거짓이 진리처럼 보인다고.

그것은 그대가 자신의 고유한 진리, 자신의 가슴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돌아오라.

그러면 진리를 진리로 보고, 거짓을 거짓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대는 진정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보고


진실을 진실로 보라.


가슴을 들여다 보고


그대의 본성을 따르라.


오쇼 법구경 강의 : 거짓을 거짓으로 보라.

진리로 가는 여행의 시작은 어디인가?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하라.

모든 붓다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들은 부정적이다. 


붓다는 말한다.

그대의 본성을 따르라

그대는 다른 사람의 집을 알뿐, 자신의 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게 없다.

이제는 다시 내면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실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진짜로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밖으로 나가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멈출때, 그대는 돌연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간다'는 것은 곧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는 것을 멈추라

어느 곳으로도 가지 말라! 아무곳으로도 가지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몸은 앉을 수 있다...그러나 문제는 그대가 내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냐 하는 것이다.

욕망, 사념, 추억, 상상 등 온갖 종류의 투영이 들끓고 있지 않은가? 그것 또한 멈추라!

어떻게 하면 그들을 멈출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과 동일시 되지 않고 무관심하면 된다. 그들에 관심을 쏟지 말라

그들에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아무상관하지 말고 자기들끼리 놀게 놔두라.


그저 침묵 속에 지켜보라.

주시하라. 주시! 





비추지 못하는 마음은


성글게 이은 지붕이다.


탐욕이 비처럼 스며들어 범람하리니


그러나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스며들지 못하리라.






불순한 생각을 따르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다음 세상에서도 고통받는다.


이렇게 그는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격는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그릇된 행동을 보고


되새기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오쇼법구경 강의 : 'Reflection'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붓다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말 뜻 그대로 비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대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거울은 그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거울은 그저 비출 뿐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것이다.

비추는 법을 잊은 마음은 항상 욕망에게 희생된다.
그 마음은 머리에 의해 희생되고, 미래에 의해 희생되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런 저런 갈망에 의해 희생된다.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은 없다.
하나의 욕망이 완성되면 다른 열 개의 욕망이 꼬리를 문다.

조심하라! 그대의 거울을 닦아서 투명하게 비출 수 있도록 하라.
실체를 비추는 법을 안다면 거기에 그대의 은신처가 있다.
그대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리의 일부이다.

모든 사념은 불순하다. 사념은 순수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상기시켜야겠다.
붓다가 말하는 '불순한 생각'은 곧 '생각'이다.
그가 불순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냥 '생각'이라고 말하면 그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순한 생각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불순한 생각'은 항상 생각을 의미한다.
오직, '무념'만이 순수하다. 그때엔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고 그대 홀로이기 때문이다.
이 '홀로있음'은 순수하다. 그리고 이 '홀로있음' 안에서 일어날 가치가 있는 일은 모두 일어난다.







그러나 법을 따르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이렇게 그는 양쪽 세상 모두에서 기뻐한다.


자신이 행한 옳은 행동을 돌이켜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상에서 크게 수확된 것은


다음 세상에서 더욱더 커진다.


오쇼 법구경 강의 : 지옥을 만든 것은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회고할 때,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대는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핑계를 댈 수도 없고 변명의 여지도 없다. 그것은 그대의 책임이다.

이런 생각은 그대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더많은 생각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담마에 따른다면, 그대 내면의 가장 중심에 있는 본성을 따른다면,

그대는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즐거울 것이다.

붓다는 '저기'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즐거우면 저기에서도 즐거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다음 순간에는 더 많은 즐거움이 찾아 올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경전을 읽어도,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쇼 법구경 강의 : 모든 것은 행동에 달려 있다.

훌륭한 생각을 품는 것 만으로는 아무 소용도 없다.

신, 낙원, 모크샤에 대해 아름다운 욕망을 품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안는다.

명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전혀 무익하다. 그대는 직접 행해야 한다.

그대는 평생 동안 명상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아무것도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위 영적인 모임이라는 곳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일요일 날 교회에 나가 주의 깊고 진지하게 설교를 듣는다.

그러나 일단 교회 밖으로 나오면 그 설교는 그들의 삶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사실, 설교자 자신도 자기의 말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사업일 뿐이다.

그는 설교를 해서 먹고 산다. 그는 직업인이다.


신앙은 언어의 세계에 속한다.

그대를 행동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은 깊은 신뢰이다.

행동은 위험을 수반한다. 저쪽해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저쪽 해안을 향해 헤엄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저쪽해안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쪽 해안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보통 신앙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삶에 대해 확고한 신뢰가 없는 한, 그대 내면의 목소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한,

지도도 없는 바다로 뛰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행동만이 그대의 신뢰를 증명할 것이다.

오직 행동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는 남의 소를 세고 있는 목동인가?


진리의 길을 함께 걷지 않으려는가?


오쇼 법구경 강의 : 세상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소를 세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은 열다섯 마리를 갖고 있고, 저 사람은 열세 마리를 갖고 있고....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은 단 한 마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바로 이것이 종교하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베다의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평생을 소비한다. 성경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평생을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양의 숫자를 세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의 양을 세고 있지 말라. 안으로 들어가라!
경전을 읽는데 그치지 말라. 내면으로 들어가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데 만족하지 말라. 그 길에 참여하라!
붓다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리고 붓다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데 그치지 말라.

그대의 길을 가라. 진리의 길에 동참하라!
그의 손가락을 숭배하지 말라. 달을 보라!






아무리 경전을 적게 읽고


말을 적게 한다 해도,


법을 행동으로 옮기라.


오쇼 법구경 강의 : '법'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의을 환기시켜야겠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말은 잘못된 연상 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은 '담마'를 옮긴 것이다. 영원한 법, 우주의 법, 로고스를 '법'이라는 말로 옮긴 것이다.

"법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은 헌법을 준수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그대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이다.






탐욕, 적의, 어리석음의 낡은 길을 포기하라.


진리를 알고 평화를 찾으라.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라.


오쇼 법구경 강의 : 낡은 길을 버리고....

그대는 과거를 잘라내야 한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한칼에 과거를 절단해야 한다. 이것이 산야스이다.

단 한칼에 과거를 잘라내는 것, 이것이 산야스의 의미이다.

그대가 걸어온 낡은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과 미움의 길, 어리석음의 길이다.

미움을 통해 움직이지 말라. 재물을 탐내지 말라. 미신을 믿지 말라,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미지의 세계로 껑충 뛰어들 수 있다면...


과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대는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데 익숙하다.

과거를 포기할 때 며칠 동안은 당황할 것이다. 방향감각을 잃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진공 상태에 놓일 것이다. 그 진공 상태를 통과해 지나가야한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당연히 치뤄야하는 대가이다.

그리고 일단 진공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진리가 드러난다. 그리고 평화가 그림자처럼 진리의 뒤를 따를 것이다..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라.


붓다는 이말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나 스승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스승의 말이 담긴 책을 익는 것만으로는 진리의 길에 동참할 수 없다.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라.


아이스 담모 사난따노....




1.쌍의 품 [Yamakavagga] 법구경 / 담마파다





1.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



2.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자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


3.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 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4.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 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진다.


5.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윔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6.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 라고

다른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니

이러한 것을 자각하면

그 때문에 다툼이 그친다.


7.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루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8.
아름다움에 팀닉하지 않고

감관을 잘 수호하여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믿음을 지니고 힘써 정진하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



9.
혼탁을 여의지 못하고

가사를 걸치고자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없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조차 없다.


10.
혼탁을 끊어 버리고

계행을 잘 확립한다면,

자제와 진실이 있는 것이니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다.


11.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12.
핵심인 것을 핵심인 것이라고 여기고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올바른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바로 핵심적인 것에 도달한다.



13.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14.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



15.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16.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17.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한다.



18.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



19.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아,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20.
경전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잘 마음을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집착 여의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리


법구경 소개  

법구경은 팔만대장경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다.
원래의 책이름은 빠알리어로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 또는 산스크리스트어로는  다르마파다 (Dharmapada 법구경)라고 한다.
그 뜻은 오늘날의 말로 '가르침의 조각들' 또는 '진리의 길' '진리의 말씀'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고 그것은 다시 '진리'라고 표현될 수 있고,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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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구경에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 여러 북인도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어떻게 가르침을 모았느냐, 어떻게 시들을 모았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 경전들이 있다.
그리고 경전들 가운데는 같은 경이라도 시들의 숫자나 해설이 차이가 나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빠알리 법구경은 부처님 께서 살던 당대 (B.C 6세기) 인도의 언어였던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것으로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 자기나라의 문자로 표기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는 가장 간략한 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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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구경은 주제에 따라 26품으로 나뉘어 423개의 시들을 포함하는 시선집이다.




법구경-담마파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해제 中



↘범어 법구경을 번역한 유기난은 천축(인도)의 승이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삼장(三藏)에 밝고 , 특히 아함경(阿含經)에 밝아, 뒤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위(魏)나라 황무 3년에 입률염(笠律炎)과 이 법구경을 번역했던 것이다. 이 법구경은 제일 무상품으로부터 제 39품 길상품에 이르는 것을 모두 번역한 것으로, 간단하기는 하지만 불교의 전체의 내용을 보여 주고 있으며, 실제로 인간생활의 여러 분야에 걸쳐 다 포함되어 있다.